‘영원한 농민운동가 진보정치의 버팀목’ 강병기의 삶

[자주시보] 강병기 동지 장례위원회 제공

김삼석 기자 | 기사입력 2021/02/02 [11:16]

‘영원한 농민운동가 진보정치의 버팀목’ 강병기의 삶

[자주시보] 강병기 동지 장례위원회 제공

김삼석 기자 | 입력 : 2021/02/02 [11:16]

 

‘영원한 농민운동가 진보정치의 버팀목’ 강병기 동지의 삶

 

1960년 8월 5일 경남 진주 대곡면 설매리에서 장남(5남매)으로 출생, 1965년 부산 연지동으로 이사하여 무허가 판자집에서 생활하다

 

▲ 어머니와 큰 어머님, 두 사촌형님과 함께.  


강병기 부의장은 1960년 8월 5일 진주시 대곡면 진양군 설매리에서 농사를 짓던 부모님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60년대 중공업 우선 정책의 일환으로 공장 확장 붐이 일어나며 강 부의장의 아버지가 부산 연지동에 위치한 럭키금성 치약공장에 입사하여 강 부의장은 진주를 떠나 부산에 자리를 잡게 된다. 월세를 낼 돈도 없어 고육지책 끝에 어머님이 지은 집은 무허가 ‘콜타르 집’이었다.

 

1967년 부산 연지초등학교 입학, 가난의 차별을 깨닫고 공부에 매진하기 시작하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강 부의장에겐 부잣집 친구가 하나 생겼다. 그 친구는 당시에 유치원을 나왔을 정도로 돈이 많은 집의 아이였는데, 강 부의장은 친구와 가깝게 지내며 자주 집에 놀러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집의 어머니가 강 부의장과 그 친구를 앞에 세워두곤 “너 왜 저런 지저분한 애랑 같이 노는 거니? 저런 애랑 놀지 마!”라며 크게 화를 내는 일이 생겼다. 어린 나이에 큰 상처를 준 그 일을 강 부의장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한다. 그 일로 강 부의장은 ‘부자들은 우리랑 같이 놀 수 없는 존재구나’라고 생각하며 ‘가난한 집 아이가 공부까지 못해야 하나?’며 공부에 매진할 수 있었다.

 

1972년 진주 대곡중학교 입학, 1학기를 제외하고 전학기 장학금으로 학교생활하다

 

초등학교 1학년 시절 부잣집에서 받은 충격과 어머니에 대한 연민은 강 부의장을 더욱 학업에 열중하게 했다. 덕분에 강 부의장은 중학교 1학년 1학기를 제외하고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전액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

 

강 부의장은 중학교 때부터 육군사관학교 입학을 꿈꿨다. 기계공고에 가서 기술자로 성공하겠다는 친구와 각자 목표를 이루기로 혈서를 쓸 정도였으니 얼마나 목표의식이 강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대곡고등학교에 입학한 강 부의장은 ‘꼭 대학을 나와서 좋은 직장에 취직하여 어머니의 얼굴에 웃음을 드리겠다’는 목표를 다시금 다졌다. 그것은 강 부의장의 소년 시절을 관통하는 꿈이었기 때문이다.

 

1978년 부산대학교 공과대학 입학, 1979년 부마항쟁 참여하며 1983년 대학졸업을 앞두고 평생운동을 결심하다

 

▲ 대학시절의 모습. 두 번째 열 왼쪽에서 세 번째가 강병기 부의장.  

 

대입을 앞두고 강 부의장은 정치학과를 나와서 기자가 되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이미 부산대에 다니고 있던 친척 누나가 ‘그것은 보장된 길이 아니’라며 만류했다. 결국 강 부의장은 어머니에게 효도해야겠다는 생각에 부산대 공대에 입학하게 된다. 부산대 공대를 졸업하면 현대자동차에 자동으로 입사하던 시절이었다.

 

“박정희 군부독재 타도하자!” 주변 학생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몰렸고, 그 학생은 학내 상주하던 사복경찰에 의해 끌려나갔다. 부마항쟁의 첫 출발점이 되는 사건이었다. 대학에 입학한 강 부의장은 부마항쟁과 함께 그렇게 동지의 운동이 시작되었다.

 

“어머니 저는 어머니 얼굴에 웃음을 드리는 것이 인생의 목표였습니다... 월급쟁이가 되면 동생들 학비도 대주면서 평범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 저는 이렇게 가난하고 힘들게 살아가는 이 세상을 운명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다릅니다. 이 세상을 먼저 뜯어고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졸업장을 포기하고 이 땅의 평범한 민중으로 살아가겠습니다”. 어머니의 불호령을 걱정했으나 어머니는 졸업장만은 받아달라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를 키울 때 내 새끼라서 대학공부를 시키고 나중에 덕을 보자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나는 너를 키우면서 항상 내 아들이라 생각하지 않고 다른 많은 사람들의 아들이라고 생각했다. 네 선택대로 해라!”. 어머니의 넓은 마음 덕분에 평생운동의 길에 들어설 수 있었다.

 

1984년 대학졸업 후 농사를 짓기 위해 진주로 복귀, 진주에서 처음으로 5.18 학살자 전두환 군사독재 타도 가두시위를 주도하다

 

강 부의장이 선택한 길은 농민운동이었다. 노동운동으로 진출하는 것이 대세였던 시절이었지만, ‘농민 없이 사회변혁이 되겠는가?’하는 의문과 농촌 출신이라는 탯줄의식에 끌려 농민운동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1986년 진주에서 “5.18학살자 전두환 군사독재 타도” 가두 시위를 주도했다. 당시 경상도에서는 전두환 반대 시위 그 자체가 불온시 되어온 상황이었다. 하지만 강 부의장은 광주의 진실을 알려야 한다며 가두시위를 기획하고 직접 선동까지 했다. 구속과 수배를 각오해야 하는 결의였다.

 

1987년 가톨릭농민회 경남 총무로 농민운동 시작, 1995년 ‘5.18 학살자 처벌 특별법 제정 서부경남비상대책위원회’ 집행위원장을 맡다

 

강 부의장은 가톨릭농민회를 알게 되었고, 경남 가톨릭농민회 총무 자리를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들어왔다. 그렇게 그는 가톨릭농민회 총무로 농민운동의 첫걸음을 뗐다. 그리고 1990년 전국농민회총연맹(이하 전농)이 만들어지고 전농에서 활동하게 된다.

 

전두환 노태우 학살자의 공소시효가 끝나는 1995년. 학살자 처벌을 위한 대책위가 만들어진다. 그에 앞장선 사람이 바로 강 부의장이다. 서부경남에서도 대책위가 만들어지고, 1995년 5.18 학살자 처벌 특별법 제정 서부경남비상대책위원회 집행위원장을 맡게 된다.

 

1999년 전농 사무총장 권한대행으로 서울 상경, 2001년 전국농민회총연맹 사무총장으로

 

▲ WTO 반대 투쟁. 정광훈 전농 의장(왼쪽)과 함께.  


농민회 활동을 하던 중에 전농 중앙사무총장이 임기를 수행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갑자기 강 부의장에게 직무대행을 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요청을 한 분은 정광훈 의장님이다. 평소에 정광훈 의장을 존경해 왔던 강 부의장은 여러 어려움이 있었지만 바로 수락한다. 그리고 다음날 바로 서울로 올라간다. 그리고 2001년 연이어 전농 사무총장을 역임한다. 전농 사무총장을 맡은 강 부의장이 맡았던 첫 번째 큰 사업은 바로 ‘남북농민통일대회’였다.

 

강 부의장은 7번이나 남과 북을 오가는 분주함 속에 결국 금강산에서 ‘남북농민통일대회’를 성사시킬 수 있었다. 남측 농민 680여 명과 북측 농민 600여 명 등 모두 1천 300여 명에 이르는 인원이 참가했다. 단일 교류행사로는 역대 최대 규모였다.

 

▲ 전농 사무총장이 되자마자 맡게 된 첫 사업은 바로 분단이래 최초의 ‘남북농민통일대회’였다. (사진 왼쪽이 강병기 부의장)  

 

2002년 전국농민회총연맹 정책위원장으로 ‘최초’의 30만 농민대항쟁을 조직, ‘최초’의 전농 정치방침 조직/ 2006년~2010년 민주노동당 최고위원과 경남도당 위원장으로 진보정치의 전면에 서다

 

사무총장 임기를 마치고 정책위원장으로 자리를 옮긴 강 부의장은 WTO(쌀개방을 요구하는 세계무역기구)라는 거대한 파고를 막아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농민전체의 삶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강 부의장은 질적으로 혁신적인 대중투쟁을 조직하여 돌파구를 마련하자고 제안했다. 그간 3만 5천 명이 최대 규모였던 농민대회를 30만 농민항쟁으로 발전시키자는 제안이었다. 강 부의장의 제안은 결국 ‘한국 농민운동 역사상 최대의 집회’라는 역사에 길이 남은 30만 농민대항쟁을 만들어 냈다. 진주농민회만 하더라도 버스만 167대를 동원했을 정도였고 서울의 지하철과 거리가 농민의 물결로 넘쳐난 날이었다. 30만 농민대항쟁을 성공적으로 조직한 강 부의장은 2003년 11월, 전농 대의원대회에서 농민운동 역사상 최초의 정치세력화 방침을 결정하는데 힘을 쏟았다. 민주노총에서도 아직 결정하지 못한, 한 명의 국회의원도 없었던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지지 방침을 결정한 것이다.

 

그리고 2004년 민주노동당의 원내진출 이후 강 부의장은 민주노동당 최고위원이 되었다. 2003년 전농 정치세력화 결정 이후 ‘역사의 도구’를 자임하고 진보정치의 일선에서 뛰어온 동지는 당내외에서 이미 유력한 정치인이 되어 있었고 2010년 지방선거에서 경남도지사 후보로 출마하게 되었다. 그리고 야권연대를 통해 결국 ‘최초의 공동지방정부’와 ‘최초의 야권연대 정무부지사’라는 성과를 얻는다.

 

▲ 전농 정치방침에 따라 진주시 농민회원 100명과 함께 입당식을 진행한 강병기 부의장  

 

2012년 통합진보당의 분당 위기에 단결의 기치를 들고 당대표 후보로 뛰어들다

 

민주노동당은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당시 진보신당과 국민참여당 등과 함께 통합진보당을 구성한다. 하지만 선거 이후 극심한 갈등을 빚게 된다. 당시 강 부의장은 평생의 동지인 강기갑 의원을 상대로 [통합]과 [단결]을 호소하며 후보로 출마한다.

 

가까운 동지들도 출마를 만류했지만 결국 강 부의장은 경선에 뛰어들었다. 출마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강 부의장이 평생의 스승으로 모시고 있던 오종렬 의장과의 만남이었다. 후보등록을 앞두고 급하게 강 부의장을 호출한 오종렬 의장은 자주민주통일운동의 단결에 몸을 던져야 할 때라는 조언을 주었고, 강 부의장은 이튿날 새벽 곧장 경선 후보 수락을 알리고 서울로 올라갔다. 단결이라는 역사적 책무에 ‘도구’가 되기를 결단한 것이었다.

 

통합진보당 해산 전후, 진보정치의 가장 어두운 시절을 책임지다

 

통합진보당에 대한 공격은 비례경선 문제로 끝나지 않았다. 부정선거로 임기 초반부터 정치적 위기에 몰린 박근혜 정권은 국면전환을 위해 내란음모사건과 정당해산 청구를 들고 나왔고 통합진보당과 자주민주통일 운동을 소멸시키기 위해 총공세를 진행했다. 정당 해산의 위기에서 강 부의장은 당원들의 추대로 당대표 후보로 나서게 되었다. 모두가 합심하여 지도부를 구성했고 선거에 돌입했으나 투표를 앞두고 당이 해산되었다. 그렇게 강 부의장은 ‘한국사회에서 처음으로 해산된 진보정당의 마지막 당대표 후보’로 역사에 남았다.

 

해산 이후 조직역량을 추스르고 공안탄압을 대비하기 위해 만든 ‘민주수호 공안탄압대책회의’에서도 강 부의장은 대표의 책임을 짊어져야 했다.

 

오종렬 의장님 뒤를 따라 5.18민족통일학교 이사장이 되다

 

▲ 오종렬 의장 장례식에서  

 

강 부의장이 마지막까지 놓지 않았던 일은 바로 5.18 항쟁 진상규명이었다. 진주에서 1985년부터 학살자 처벌 투쟁에 앞장섰던 강 부의장은 여전히 계속되는 광주의 진상규명 요구를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5.18민족통일학교(5.18학교)’였다. 5.18학교는 강 부의장의 스승이었던 오종렬 의장의 생애 마지막 사업이었기 때문에, 오종렬 의장의 건강이 악화된 이후 강 부의장이 상임운영위원장으로 학교 운영을 전적으로 책임져왔다. 강 부의장은 오종렬 의장의 장례 기간에도 호상으로 조문객을 맞고 의장 사후에도 현재까지 5.18학교 이사장을 맡으며 의장의 유지를 따르기 위해 노력해왔다.

 

다시 농민운동에 뛰어들다

 

강 부의장은 뒤에 물러서 구경하거나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진보정당 창당의 마중물 역할을 마친 강 부의장은 다시 농민운동에 뛰어들었다. 전농 부의장에 추천된 것이다. 그 역임을 자임했다. 강 부의장은 전농의 교육사업을 전담해 ‘농사짓고 학습하고 투쟁하는’ 농민운동의 전통을 되살리려고 했다. 농민학교를 개최하기도 했고 농민운동 활동가들의 의식화에 힘을 모았다.

- 강병기 전농 부의장, 5.18민족통일학교 자서전 「따뜻한 진보」(자루기획, 2009)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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